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습니다.
어제 오후에 회사에서 조퇴를 한 뒤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케이드레스오브백색지라고 하는 한복 드레스 매장으로 향했다.
결혼식 피로연 때 입을 우리 신부님의 한복 드레스를 고르기 위함이었고 나는 사진 찍어주는 돌쇠 역할로 쫓아갔는데 매장이 가파른 언덕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더랬다.
여친은 4호선을 타고 내려오고 나는 5호선을 타고 가는 중이라 중간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갔는데, 엄청 막히는 남산 터널도 통과해야 하고... 여튼 내가 생각하기에도 자차로 다니기 힘든 동네 같았는데, 택시기사님도 도착해선 다니기 싫은 곳이라고 한소리 하셨더랬다.
뭐 암튼 위치는 험악하나, 내부는 살랑살랑하고 예쁜 곳이었는데 담당 직원분도 조용조용,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예비 신부들에게 엄청 친절하게 잘 해주는 곳인 듯 했다.
우리 각시는 총 다섯 벌의 한복 드레스를 입어보았고, 맨 마지막 것으로 고른 뒤에 건물 밖으로 나서니 대충 오후 7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약간 습하긴 했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마중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하늘도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나름 로맨틱했던 관계로 녹사평역까지 걸어가서 인근의 맛집을 찾아 저녁을 먹기로 했다.
녹사평역으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한편엔 아파트 단지가 그리고 반대편엔 산동네가 있었고 사이에는 거대한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마치 계급을 나누는 장벽 같다는 인상을 받았더랬다.
녹사평역에 도착한 뒤에 맛집을 검색했는데 다음에서 무려 별점 4.5를 기록하고 있던 크리스피 포크 타운 (Crispy Pork Town)이라는 곳을 발견! 뭔가를 주문하긴 했는데 이름은 까먹었고... 양은 좀 적은 것 같은데 엄청 맛있었더랬다. 여긴 녹사평역 맛집으로 강추~!!
식사를 마친 뒤 주변을 둘러보니 여친이 “여기 다 외국인 밖에 없어”라고 말했고 난 “여기에선 우리가 외국인이야...”라고 했을 정도로 역시 이곳이 이태원 클라쓰인가 싶었더랬다.
배도 꺼뜨릴 겸 녹사평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태원역 쪽을 향해서 산책하듯 걷기 시작했는데 어디선가 봤던 풍경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렇다. 이 길은 2022년 12월에 어머니와 함께 한번 다녀간 길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고 어머니와 난 이태원역 1번 출구의 그 통곡의 골목에서 추모를 드린 뒤 걸어서 녹사평역 인근에 있었던 시민분향소까지 가서 분향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여자 친구와 함께 반대로 녹사평역에서 이태원역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
여자 친구도 뭔가가 느껴졌는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이태원역으로 향하는 길의 도중에서 만난 다른 좁은 골목길을 볼 때마다 왠지 불안하고 무섭다고 말했더랬다.
이윽고 도착한. 실로 오랜만에 와본... 이태원 참사가 있었던 그 현장은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덮개가 씌워진 돌과 바로 옆엔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October 29 Memorial Alley)이라는 표지판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골목의 입구 바닥에는 황동인 것 같은 금속으로 ‘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습니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난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여자 친구가 바닥에 새겨진 글자를 보며 “바닥에 껌이 붙어 있어서 좀 그렇다”고 해서 다시 보니 음... 나도 좀 마음이 안 좋긴 했다.
벽은 도색도 새로 한 듯 했고, 원래 있던 가게들도 일부는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나였어도 차마 그 자릴 지키며 장사를 이어나가긴 힘들었으리라..
암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올해 다시 10월 29일이 찾아올 텐데... 그때 난 또 어떤 방식으로 추모를 하고 있을까...
해마다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계속 쌓이고 있다. 3년은 너무 길다.
2022년 12월의 그때 그 골목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jinohng/222958596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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