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소식

이집트의 왕자 1998 (The Prince of Egypt 1998) 애니메이션과 사람이야기 21회

조아진 2011. 6. 9. 16:04

 

 

방문미술 그림샘 & 월간아트앤씨

애니메이션과 사람이야기 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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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21th Animation & Human Story

 

이집트의 왕자 1998 / 드림웍스 / 브렌다 챔프먼, 스티브 히크너, 사이먼 웰스

[ The Prince of Egypt 1998 / Dreamworks / Brenda Chapman_Steve Hickner_Simon Wells ]

 

 

 

기적을 바라는 아주 올바른 자세

[글 / 조아진 : 방문미술 그림샘 대표]

 

 

 

거짓과 진실의 이상한 동거

때때로 익숙하게 오가던 길의 이질감과 낯설음에 멈춰 서고 만다. 무언가가 지난 기억속에서 이곳에 대한 추억이 있었노라고 이야기 한다. 새로 들어선 낯선 것들 사이로 옛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아무 것을 찾을 수 없다. 결국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기억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다시 고이 묻어둔다. 지금은 사라진 잠실역 앞 길다랗게 늘어서서 꽤나 장관이었던 포장마차 촌이 그랬다. 그리고 인사동 비좁은 길목마다 시선을 빼앗고 향기와 소리로 유혹하던 노점상들이 그렇다. 그 곳에서의 시간은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시대의 치열하고 추악한 난잡함이 아니라 그저 사람 냄새나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촌(村) 그 자체이다.

 

 

 

 

 

 

물론 비겁하고 비열한 정체성을 가진 장사꾼들도 함께 섞여 있다. 자릿세 한 푼 내지 않고서 수년간 자리에서 상행위를 해오다 정작 그 자리를 팔 때엔 권리금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곳곳에 노점상들이 들어차 있으니 누군가 새로 자리하나 펼 요량이면 큰 싸움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까지도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니 터줏대감 나름대로의 룰이 있으려니 하고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상도(常道)가 없다. 예술과 문화특화거리로써의 정체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곳저곳에서 공수해온 우리문화를 대표하는 예술품, 관광기념품이란 것이 대부분 ‘마데 인 차이나’ 이거나 ‘마데 인 말레이시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다. 거짓과 진실의 이상한 동거다. 거짓된 이미지가 한국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것조차도 이미 한국적 이미지의 아우라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것은 마치 중국의 짝퉁 명품브랜드를 일부러 사러간다는 외국인들의 관대한 문화심리를 떠올리게 한다.) 북적대고 혼잡한데다가 가짜 한국브랜드가 넘쳐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인사동 거리를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콘텐츠라는 의미다.

 

 

 

 

 

 

 

불가피한 희생

구청입장에서도 몇 가지 방안을 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입장차가 너무나 분명하다. 아무도 희생하려 들지 않을뿐더러 아무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결국 강철로 제련해 만든 법의 모난 틀에 동그란 사람을 끼워 맞추게 된다. 자꾸 부대끼게 되고 결국 억압, 폭력, 미움, 원망, 피눈물이 남는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만든 법이라면, 탄력 좋은 나무 울타리처럼 때때로 줄이고 늘여가며 모양새 좋게 만들어가는 관습촌 안에서의 시장경제일 순 없을까. 모두를 똑같은 잣대와 기준으로 제단하고 획일화 시켜야 할까. 그리고 이미 중국산 대량생산 복제 예술품이 인사동 문화거리의 곳곳을 잠식하고 있는 지금, 예술가들이 없는 예술가의 거리와 우리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가득한 거리를 과연 문화예술로 특화된 거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의 출신을 알고 괴로워하던 모세에게 이집트의 왕 세티는 말한다. “때때로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불가피한 것이란다.” 그 불가피했던 희생이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과연 불가피한 희생이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리고 왜 항상 불가피한 희생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만이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관광특화거리로써의 인사동은 외국인들에게 과연 어떤 모습의 한국을 눈과 귀와 마음에 담아 주게 될까. 그러면서 드는 의문. 과연 누가 진정한 의미의 희생자일까?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강에서 건진 아이

고된 노동과 억압속에서도 자꾸만 늘어가는 히브리인은 이집트왕 세티에게 불안한 동거 즉,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히브리인의 사내아이를 모두 물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을 통하여 훗날 등장할 예언자의 출현과 히브리인들의 반란을 막고자 한다. 그러한 피바람 속에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광주리에 역청을 발라 물이 새어 들지 않도록 한 뒤 모세(본명은 ‘요김’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라는 의미)를 광주리에 담아 강물에 띄워 보냈고, 히브리인의 아기인 것을 알았지만 측은히 여긴 이집트의 여왕에게 구해져 키워지게 된다. 여왕의 비호아래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게 된 모세는 어느 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정체성의 혼란으로 괴로워하던 중 뜻하지 않은 이집트인 살인으로 인하여 애굽을 탈출하여 도망자 신세가 된다. 작열하는 태양, 사막에서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다다른 곳이 미디안이라는 작은 히브리 유랑족의 마을. 그곳에서 모세는 아내 십보라를 맞이하고 양치기로써 소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기적을 만드는 주체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양을 치던 모세는 양을 치던 도중 무리를 벗어난 양을 쫓아 동굴로 들어가게 되고 운명처럼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그 신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 억압과 폭력속에서 고통 받는 자신의 백성을 해방시키고 데려오라 명한다. 일찍이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해왔던 모세에게 파라오의 절대권력은 사막의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거역할 수 없는 힘 그 자체였기 때문에 신의 명령을 ‘의심’하고 ‘토’를 달고 만다. 그러자 천둥처럼 내리치는 한 마디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으며, 벙어리, 맹인을 만들고 시력을 주었느냐?” 아, 참 싫은 대사 중에 하나다. 생과 사와 고통과 복을 주신 이가 모두 하나님이라시는데 굳이 위험한 애굽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여 오라신다. 직접 하시면 될 일을 항상 ‘인간’을 빌어서 하신다. 그러면서 되묻고 싶어진다. 기적을 만드는 것은 과연 신인가 사람인가? 아무튼 그리하여 모세는 아내 십보라와 함께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 애굽으로 향한다.

 

 

 

 

 

 

 

왜 모세인가?

히브리인으로 태어나 이집트의 왕자로 살다 모든 것을 잃고서 사막을 방황하던 청년 모세는 소박하지만 어쩌면 자신의 행복 그 자체의 삶을 미디안 마을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에서의 모세라는 캐릭터는 딱히 믿음의 사도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게 안보인다. 즉, 성경에서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동기부여의 부재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콘텐츠라는 아우라에 기대어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이 히브리인들 참 가관이다. 이집트인들에게 억압과 고통으로 혹사당하면서도 정작 자신들 중 어느 누구도 이집트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서려는 자들이 없다. 항상 기도와 고통속에서 하나님께 기적적인 구원을 갈망하며 울부짖기만 한다. 기적을 원한다면 직접 움직여야하는 것이 당연지사.(물론 종교적인 견지에서 그것의 대의는 ‘신의 정의’여야만 한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불특정 독자들을 위해 표현을 달리해 보자. 이것을 믿음과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의 폭력과 권력 앞에 짐승과 다름없는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은 겁쟁이로써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먹과 채찍 아래 쓰러져 신음하면서도 부조리와 비인도적 행위 앞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남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과 참 비슷하지 아니한가? 심지어 이 히브리인들 모세의 기적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에 나와서도 끊임없이 불평불만이 가득했다. 심지어 모세가 기도드리러 산에 올라간 사이 우상을 만들고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내가 신이었어도 이런 백성들은 개념이 박힐 때까지 광야에서 수 십 년을 떠돌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모세라는 캐릭터는 살인이라는 다소 과격한 방법을 택한 셈이 되긴 했지만 고통받는 노인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인들에게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대응행동을 한 인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모세의 본명(요김=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의 의미에서도 드러나듯 준비된 의미의 캐릭터이겠지만 선택의 순간에 있어서 모세의 선택은 실천(행동)이었던 것이다.

 

 

 

 

 

 

입장의 차이

한 편, 이집트의 왕처럼 자신의 업적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왕의 업적이 곧 나라전체의 업적인 셈이고 나라전체의 영광은 곧 개개인의 행복이라 말한다. 때문에 대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라미드와 같은 상징물을 가장 크게, 가장 높게 쌓고 만드는 것이 위대함의 증거라 말한다. (이런 치적주의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규모 공사를 좋아하는 듯하다.) 생명을 두고서 그 가치의 귀중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희생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금세 생각이 바뀐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애굽으로 돌아온 모세는 동족들의 해방을 요구하지만 꽤나 절친했던 형 람세스는 비웃으며 거절한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게 되고 람세스는 자신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겪고 나서야 히브리인들의 자유를 허락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 세티가 히브리인들의 어린 아들들을 물에 빠뜨려 악어의 먹이로 삼았듯 이집트인들의 모든 장자(長子)들이 죽음을 맞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복수의 딜레마가 늘 그렇듯 람세스의 상실감과 좌절감은 히브리인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변화되어 그들을 쫓게 만든다. 혹자는 같은 아비의 심정으로 람세스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와 정의는 서로 다르다.

람세스라는 캐릭터가 자신보다 더 거대한 초자연적 힘을 가진 신이라는 존재에 대항하는 인간(혹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캐릭터로 보여 질수도 있다. 그러나 착취자, 절대권력자에게 ‘정의’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애에서 비롯된 궤변일 뿐이다. 입장의 차이에 있어서 옳지 못한 행동이란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옳고 그름의 정당성의 판가름에서 해야 하는 행동과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종교에서의 정의는 당연히 신의 뜻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그 중에서도 인사동에서 빚어지고 있는 문제들은 과연 어떤 공의가 정당함을 가질 수 있을까. 스스로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정의와 인권을 주장 할 수 있을까. 혹은 절차대로의 법을 집행한다는 명목 하에 가장 소중히 지켜져야 할 기본인권 보호기능을 상실하고 말 것인가. 모세 같은 이가 갑자기 인사동 한복판에 나타나 홍해를 가르는 기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기적을 기다리며

기적이라는 희망은 잡혀서 해코지 당할 지도 모른다는 착각속에 지레 겁먹고 앞다퉈 날아오르는 비둘기들처럼 때때로 희멀건 새똥만을 남긴체 허무하게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 때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낙타가 모세 머리카락 뜯어 먹는 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찾아보시라! 애니메이션에서 모세는 두 번씩이나 머리카락을 뜯어 먹힌다.) 기적이란 바라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법이다. 때문에 그 기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오해와 불신은 소통의 단절에서 온다.

몇 가지 소견을 적어 보자면, 인사동 걷기 길의 동선 자체를 자동차 이동경로를 모두 차단한 뒤 코스화하여 모든 길을 걸을 수 있게 함으로써 집중된 상권을 고르게 분산시키는 방안과 외국의 노점상 지원방법에서 한 것처럼 판매대 규격을 일반화시키고 구청에서 해당 판매대를 인가해주는 방식 그리고 다음 아고라의 네티즌 haeorm님의 의견처럼 특정지역은 기 입주노점상들이 아닌 외부인들로부터 지원신청을 받아 판매대의 종류와 수를 미리 조절하여 도심속 문예장터를 여는 방법 등을 조화롭게 구성하면 어떨까. 사람을 위한 법의 집행이라는 기본 전제아래 서로 양해할만한 희생을 도출해 내는 것이 진정한 정치적 역량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P.S. 동문회 회장을 맡아서 동문모임을 재능기부와 자선판매 및 모금행사를 개최하려고 공공장소 섭외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이 참. 좋은 일 하기도 힘들구나하는 점이었다. 공공장소에서의 집회는 캠페인만 가능. 모금 및 판매활동은 일절금지. 그 놈의 법은 참 누가 만들었나 싶다.

 

 

 

The Prince of Egypt 1998

 

 

 

작품개요

제 목 : 이집트 왕자 The Prince of Egypt (1998)

1998.12.19 개봉 / 연소자 관람가 / 99분 / 애니메이션 / 미국

감 독 : 브렌다 챔프만, 스티브 히크너, 사이먼 웰스

 

더 빙 :발 킬머(모세), 산드라 블록(미리암), 랄프 파인즈(람세스), 대니 글로버(제트로), 제프 골드블럼(아론), 스티브 마틴(호페), 헬렌 미렌(여왕), 미셸 파이퍼(십보라), 마틴 쇼트(허이), 패트릭 스튜어트(파라오)

 

제 작 : 제프리 카젠버그

 

음 악 : 스티븐 슈워츠

 

수 상 : 제71회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 (1999), 제4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주제가상, 장편 애니메이션상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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