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소식

소중한 날의 꿈 / 연필로 명상하기 (애니메이션과 사람이야기 23회)

조아진 2011. 10. 19. 16:20

 

방문미술 그림샘 & 월간아트앤씨

애니메이션과 사람이야기 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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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23th Animation & Human Story

 

소중한 날의 꿈 / 연필로 명상하기

[ Green Days / Meditation with a Pencil ]

 

평범해지는 순간을 기꺼이 마주하는 용기

[글 / 조아진 : 방문미술 그림샘 대표]

 

 

아주 오래된 일기

어떻게 될지 결말이 상상되면서도 성장드라마를 보게 된다. 그것은 여성들이 수십 번씩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귀여운 여인’을 보는 대리만족감 같은 것이랄까. 아무튼 나의 청소년기는 그만큼 보잘 것 없었다는 의미이다. 지금껏 성장드라마를 다룬 애니메이션을 꼽아보자면 독고탁류의 열혈청춘기를 제외하고서 국내에서 몇이나 다루었을까. 아니, 사실 장편애니메이션의 데뷔자체가 참 오래간만이다. 결과를 떠나서 특히 올해는 몇몇 웰메이드 애니메이션이 거칠게 갈라진 한국영화시장에서 마른 싹이나마 고개를 내밀어 주어서 무척이나 반가울 따름이다.

 

 

 

 

사실 대학이며, 대학원에서의 전공이 애니메이션인데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다. 작품 제목 그대로 소중한 날의 꿈이 다른 가지를 쳐서 뻗고 있는 중이다. 전공이 아닌 일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먹먹해지는 때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단어라서 별 감흥이 없다가, 어느 날 문득 그 언제가 보았던 것 같은 투명한 하늘을 바라봤을 때의 아련히 빛나는 추억 같은 느낌이다. 꿈이라는 단어는 아버지, 어머니만큼이나 내게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단어다. 이 작품은 그런 꿈을 품었던 시절의 순수와 낭만 그리고 용기를 상기시키는 아주 오래된 일기장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2인자의 성장통

어릴 적 누구나 가졌었을 법한 생각.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나는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엄청 위대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하는 상상들. 심지어는 꿈까지 꿨었다. 그렇지만 성인이 되기 위해 수차례 반복되는 초중고 울타리 속에서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그렇지만 너 일리는 더더욱 없다.’ 결국 상처입은 자존심은 잉여인간이라는 신조어로 강제 정의되고 만다. 세상은 늘 그래왔듯 1등만 기억한다. 그래도 질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무엇에 질 수 없었는지가 모호해진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실망, 원망, 분노는 스스로의 회개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일, 나만 아는 창피한 일이 내 일생에 처음 일어났다'는 주인공 이랑이의 고백으로 ‘소중한 날의 꿈’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창문에 묻은 손 때 조차도 정겨울 만큼 디테일한 감성이 살아 있는 이 작품은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오이랑(박신혜 목소리분)은 교내 육상대회에서 앞서나가는 친구에게 질까봐 일부러 넘어진 뒤 그저 그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포기하면 질 일도 없다”며 평범한 2인자가 되기를 거부한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서울에서 전학온 한수민(오연서 목소리분)과의 우정 그리고 김철수(송창의 목소리분)와의 풋풋한 첫사랑이 서툴게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수민은 서울사람이라는 도도함과 자신감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풋사랑 앞에서는 그저 철없는 애송이일 뿐이다. 그리고 이랑을 좋아하는 철수는 고철들을 주워서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철수는 우주비행사라는 너무 큰 꿈을 갖고 있다.

 

 

 

 

이들과 겪게 되는 소소한 일상 등과 더불어 이 작품에 더욱 애착이 가는 이유는 비현실성에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현실적인 비현실성에 있다고 생각된다. 수업시간 쪽지를 접어 날리는 장면은 왈츠를 추듯 리드미컬하게 전개되고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기댄 곳에서 벌어지는 형형색색의 꽃밭과 공룡 시퀀스는 기이하게도 학창시절 상상했었던 이미지들과도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중첩되며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들은 ‘아! 저거! 진짜 오랜만이네’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대나무 살에 푸른 비닐을 얹은 우산은 정말 반가웠다.) 그러나 극장에 걸린 이상 향수를 자극한다거나 언제나 늘 해피엔딩을 예고하는 성장드라마라거나 마냥 즐거운 기분만 갖고서 본 감흥을 마무리 할 순 없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너무 빨리 극장에서 내려와 버렸다는 것. 현실에서조차 이 작품은 2인자 아니 세 번째, 네 번째 등으로 평범하게 잊혀져버리는 우리 모두의 모습과 놀랍게도 일치하며 극장에서 밀려난 것이다. 원더풀데이즈로부터 시작된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성장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달리기

1996년 윤상과 신해철이 함께 작업한 앨범 ‘노땐스 1집’에 ‘달리기’라는 노래가 있다.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나게 억울하겠죠. 일등 아닌 꼴등들에겐 박수조차 남의일 인걸’ 이랑은 교내 달리기 계주 시합에서 먼저 앞서 달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2위인냥 1위의 그림자 뒤로 뒤처지고 만다. 그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일부러 넘어져서’ 1등이 될 수 없었던 ‘변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난 이것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 즉,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경쟁구도를 강요받으며 자연스레 갖게 된 노예근성 같은 것이다.

 

 

 

 

서울에서 전학온 ‘차도녀’ 한수민은 또래 남자아이들에게는 관심조차 없을뿐더러 꽤나 연상의 아저씨를 흠모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 현실은 관심밖의 시시한 일상일 뿐이다. 때문에 또래 아이들 앞에서나 사내아이들 앞에서 항상 도도하고 당당하다. 이랑은 그녀의 당당함을 동경한다. 하지만 수민이 또한 감수성이 좀 더 풍부했을 뿐 아직 누군가 보다 빼어난 1%의 인간은 아니다. 그러한 일면을 간직한 한 컷. 마지막 달리기 장면에서 수민은 레이스를 가장 먼저 포기한 뒤 길가에 앉아 쉬고 있다. 그런데 소원한 관계였던 반장이 숨을 헐떡이며 낙오자석에 동참한다. 해의 방향이 바뀌고 그늘이 움직이는 대로 그들은 함께 모여 앉아 있다. 모두가 평범해지면서 동등해지는 순간이다. 꽤나 마음에 드는 상징적인 한 컷이다.

 

 

 

 

한편 미래의 우주비행사 ‘순수남 김철수’는 이랑이나 수민처럼 꿈을 찾거나 꿈을 향해 무언가 해야한다는 강박관념 자체가 없다. 조급해 하지도 않고 나와 다른 누군가를 무시하지도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도 않는다. 대신 차근차근 이해될 때까지 분해하고 조립해 본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열중할 줄 안다. 게다가 이랑이를 좋아하기 때문이겠지만 누군가에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 줄줄도 안다. 이러한 매력은 행복한 바이러스와 같아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전염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랑은 전염된다. 과연 이랑은 어떤 식으로 젊은 날의 홍역에서 벗어나게 될까.

 

 

 

 

걸어보지 못한 길

누구나 학창시절 아니 지금까지도 되짚어보게 되는 질문들 난 누구이고 어떻게 자라 어떤 발자취를 남기게 될 것인가. 누군가 보다 위에 서거나 밑에 깔려서 순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체 살아가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겁한 변명과 회피가 아니라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한 까닭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선택을 하고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철수의 삼촌과 이랑의 우주에서의 대화 장면은 다소 교훈적인 시퀀스이긴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해법이기도 하다. 차근차근히 그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 나를 밟고 설 누군가도 혹은 내가 밟고 일어설 누군가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 길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다. 달리기의 끝은 분명히 존재하며 고단했던 경주 끝엔 지겨울 만큼 쉴 수 있는 영원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애니에게

누군가는 이 작품을 혹평하며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11년이 아깝다. 투자비가 아깝다고 말하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의 형식, 표현방식에 있어서 정해진 틀이란 없다. 각각의 매체는 장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주제, 소재, 표현방식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작비가 많이 소요되는 거대한 판타지가 무조건 들어가 있어야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의의가 있다는 것은 틀린 발상이란 의미이다. 한편에서 누군가는 지난날의 순수했던 기운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도 말한다. 일정 퀄리티 이상의 웰메이드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저 그 감상을 온전히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작품개요

감독: 안재훈, 한혜진

목소리: 박신혜, 송창의, 오연서

개봉: 2011년 6월 23일

 

6회 부산국제어린이영화제(2011) 초청폐막작

15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2011) 장편 심사위원 특별상

35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2011) 장편경쟁 후보

15회 부산국제영화제(2010) 와이드 앵글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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