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과 사람이야기 29회
The 29th Animation & Human Story
별별이야기-그 여자네 집
김준, 박윤경, 이진석, 장형윤, 정연주
위대한 선택
[글 / 조아진 : 방문미술 그림샘 대표]
새 술
아침 출근 전 잠시 동안 아침뉴스 채널을 보던 중 자주 ‘시작부터 틀리다, 틀이 다르다’란 말이 자꾸 귀에 박힌다. 정치해설가가 세 명의 대통령 후보 중 기존의 정치 공식(사전)에서 벗어나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후보를 평하면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정치에 무관심하던 이들이 새로운 유권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새 술의 등장이다.
모든 권력형 비리와 양극화의 심화, 사람보다는 개발과 성장을 중심에 둔 물질만능 주의 그리고 무한경쟁에 강제적으로 내던져져 신음하며 예비 소모품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어린 학생들까지 고름과 상처투성이였던 대한민국은 수십 년째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과도기를 겪고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방조가 결국 더 큰 악재를 몰고 온 셈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다. 결국 투표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탓이며, 투표를 할 수 없도록 당일에도 일을 시키거나 해야만 했던 사람들을 양산한 정치문화의 탓이다. 새 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 헌 부대에 담기거나 헌 술이 새 부대에 담기기도 했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때문에 우리는 정치에 무관심해서도 안 되며 유권자로서 권리와 의무를 성실히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건 이젠 옛말이다. 더러우면 치워야 하는 거다. 그것도 혼자 치워선 안 되고 함께 치운 뒤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어떤 정보를 갖고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어떤 믿음과 가치로 위대한 선택을 해야만 할까? 이 부분은 각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다만, 나 개인적으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 술이 많아 차고 넘치는데 담을 부대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숨막혀!
새벽에 깬 아기가 울고 있다. 아기 아빠는 깊은 잠에 빠져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결국 그 여자가 어두운 밤길을 헤매듯 아이를 찾아 안고서 다독인다. 다시 어렵게 선잠을 청한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맞벌이 부부인 두 사람이지만 아침 식사준비며 어린이 집에 아이를 맡기는 일, 남편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정리하는 일, 청소와 설거지까지 모두를 혼자서 처리해야만 한다. 설거지를 해야 하는 접시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세탁기 속의 드럼은 너무 깊고 어둡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듯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다. 그 여자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여자네 집은 무겁고 숨이 막힌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엔 가사일과 육아일이 모두 여성의 책임이라는 차별과 선입견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작품에선 뾰족한 해결방법이 제시되진 않는다. 그저 일상을 탈피하듯 판타지로 전개되는데 여느 때처럼 아이를 등에 업고 진공청소기로 청소를 하던 중 모든(버리고 싶은, 떠나고 싶은) 것들을 빨아들여 없앤다는 설정이다. 빨래도 지저분한 거실도 안방도 쌓여있는 설거지도 모두 빨아들여버린다. 재미있는 점은 쇼파(sofa) 위에서 뒹굴거리던 남편까지도 빨아들여 없애버리는데 좀 과장되게 해석하자면 여기에서의 남편이란 서로 의지가 되며 서로에게 희생할 줄 아는 소중한 존재로서의 가치보다는 오히려 타인의 희생과 수고(노동)를 바탕으로 놀고먹는 오히려 짐이 되는 존재로 상징된다는 점이다. 즉 그녀가 새로이 거듭나기 위해 과감히 버려야할 구태의연하거나 오히려 악습(惡習)에 가까운 대상으로 인지, 새로운 시작을 영위하기 위해 그녀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모든 것들을 진공청소기와 함께 청산해 버린 셈이다. 어떻게 보면 한부모 가정으로써의 홀로서기를 상징할 수도 있겠지만 가정 안에서의 이해화 화합이라는 다소 교훈적인 결말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다소 아쉬운 결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율 (調律)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희망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진공청소기를 통하여 온통을 백지의 공간으로 만든 뒤 아이를 등에 업고 새로 벽을 칠하는 엔딩 씬은 여성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자유인으로서의 의지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이, 후손, 후대를 위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가하는 근본적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더 불합리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이러한 작품이 여성 정체성이나 차별문제 이상의 과장된 페미니즘(feminism)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다소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64만 한부모 가정시대를 맞고 있는 지금 이 중 20%인 부자 가정이 최근 10년 새 무려 64%나 급증했다는 통계를 접하며 우리가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 지금의 이러한 상황을 남녀간의 차별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닌 사회구조의 공동문제로 인식하고 개선 방법을 찾기 위해 함께 조율해 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즉, 함께 열린 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서 서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봅시다란 의미인데 이러한 말을 할 때마다 누군가는 이상주의자라고도 하고 현실은 다르다란 말들을 종종 한다. 결국 기득권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편향된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새 부대
자, 다시 한 번 묻는다. 새 술이 많아 차고 넘치는데 담을 부대가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누군가가 고깝게 빌려주는 고금리의 헌 부대에 담은 뒤 후손들에게 같은 헌 부대를 물려주고서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할 것인가? 새 부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지금 당장 하는 것이 우리의 후손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강한나라로 만드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아닐까? 바뀔 것 같지 않는 남편과 죽은 시체처럼 살아가는 일과 홀로서기를 하여 어렵게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일 혹은 구조적인 모순과 차별을 바꾸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선거 실현을 위해 정치에 관심을 표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것.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 이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진정한 민주주의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별별이야기-그 여자네 집]
제작: 국가인권위원회
제작년도: 2005 / 러닝타임: 11분
감독 & 시나리오: 김준, 박윤경, 이진석, 정형윤, 정연주
스토리보드: 김준 / 캐릭터디자인: 김준
레이아웃: 김준 / 배경: 이진석
원화: 정연주, 김혜미 / 동화: 정인옥, 정연주, 김혜미
채색: 김수영, 김아미, 이민정 / 타이틀디자인: 박종우
합성: 안지민 / 스캔: 김민정
음악: 전상윤 / 텔레시네: 와이드비전
폴리: 소원종, 김은산, 송영호
사운드믹싱: 김수덕(영화진흥위원회 공공영상팀)
광학녹음: 영화진흥위원회 광학녹음실
색보정: 한재준
필름레코딩: 영화진흥위원회 디지털시각효과팀
프린트: 영화진흥위원회 현상실
[참고자료 및 출처]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해당 작가들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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