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쯤 눈이 떠졌다.
토요일인데 늦잠 좀 자야지 하고 잠자리에서 뭉기적거렸는데 어찌어찌 8시까진 잔듯 안 잔듯 시간이 지나갔다. 내가 요즘엔 주말 개념도 없어졌나보다 하고선 뒷마당에 잠이 덜 깬 멍멍이를 데리고 나가 응가와 쉬를 시켰고 밥을 주고서 씻었다.
그러다 오늘은 머리를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9시반. 보통 미용실이 10시쯤 열 것 같아서 또 우두커니 시간을 보내다가 그래도 어딘가는 모닝파마 때문에 일찍 열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어 밖을 살피니 아니나다를까 실내에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미용실이 있었고 지갑을 챙겼다.
미용실 앞까지 가긴 했는데 바로 들어갈 순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 사장님이 열심히 화장을 하고 계신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 3분정도 밖에서 기다리다 어쩌면 화장을 영원히 계속 할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고 난 유리문을 노크했다. 사장님이 어서 오라고 말씀하셨고 난 기껍게 들어가 앉았다. 난 투블럭 머리인지라 금방 머리를 깎고 나왔다.
이발을 하고 손 뒤 이젠 뭘하지? 하고 생각하다 몇 달 전부터 그리다만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선 폼만 잡다 완성 못 할 것 같아서 몇몇 물감들과 그리다만 그림을 갖고서 사무실로 향했다.
오후 한두 시쯤.
드디어 몇 달 간 미뤄뒀던 작품을 마무리 했다. 사실 100프로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작품이 이 이상 잘 나올 것 같지도 않아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은 무얼할까 고민을 했는데 도무지 회사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우리집 멍멍이가 새벽녘에 기침을 해대는 바람에 잠을 설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멍멍이 심장약을 지으러 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 밖으로 나서선 멍멍이 약을 지은 다음 뭘할까를 잠깐 고민했는데 점심을 안 먹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마침 동물병원과 같은 방향에 있는 중국집에서 짬뽕을 시켜 먹었다. 맛있었다. 멍멍이 약을 지은 후. 늦은 점심을 먹는 내내 또 다음은 뭘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마침 우리 회사가 월요일 오전마다 청소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난 월요일 오전에 어머니 전시 철수 때문에 사무실 자리를 비울 예정인지라 미리 사무실에서 내가 맡은 파트를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맡은 부분의 사무실 청소까지 마치고 사무실 밖으로 쓰레기봉투까지 내려 놓고 나선 그다음, 이젠 뭘하지? 하고 또 생각했다.
집에서건, 사무실에서건 딱히 할 게 없는 것 같아서 부모님께 영화 조커를 보시겠냐고 카톡으로 물었는데 피곤하다고 하셨다. 그럼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아! 몇 주간 바빠서 미뤄뒀던 집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다행히 들었다.
두어 시간 정도 아무생각없이 빡세게 청소를 했고 멍멍이 목욕과 이부자리 정돈, 밥까지 챙겨주고 난 뒤 뒷마당에서 담배 한대를 피우며 또 이젠 뭘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못보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어서 내 밥을 내놓으라는 듯 우리집 뒷마당 구석의 나무 아래에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임신을 한 상태였다. 난 피우던 담배를 계단 한 구석에 고이 모셔 놓은 뒤 얼른 집으로 들어가 고양이 사료를 가져와 '잘 먹고 순산해라'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밥그릇을 가득 채워주었다.
쳐다보면 경계심이 강해 밥을 잘 안 먹는 것을 알기에 계단 구석에 고이 모셔 뒀던 담배를 들고선 자리를 피해줬다. 멍하니 고양이가 사료를 먹고 있는 것을 지켜보다 아스팔트 위에서 꿈지럭 거리는 뭔가를 발견했는데 지렁이였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이 지렁이 녀석이 자꾸만 차도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난 지렁이를 집어 들고서 화단에 거처를 옮겨 주었다. 대모험을 위해 화단을 탈출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 눈에 밟힌이상 내가 생각하기에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옮겨 주는 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다보니 어느새 자정이 지났다.
사실 이 이후에도 몇 가지 일이 더 있었으나.. 아무튼 오늘은 이제 어제가 되었다. 오늘 잘 한 일은, 아니 어제 잘 한 일은 임신한 길고양이 밥 준 거랑 아스팔트 위에서 방황하던 지렁이 한 마리를 화단에 옮겨 준 것 정도이려나..
하루하루를 의미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강박이 있다. 특히 혼자 있을 땐 더욱 더 쉰다는 것에 죄책감까지 느껴질 정도라서 내게는 휴일이 더 이상 휴일이 아닌 방황과 상실의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 시간에 간섭해서 내 강박을 강제로라도 마무리를 지어 주길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사실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건지도 모르는 나다.
내일은 좀 다를까? 다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내일은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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