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호주에서 유학중인 27살 대학생입니다. 지금 광우병 대운하 등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는 이슈들 사이에서 제 글이 많이 읽혀 질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결국 사회 전반에 걸친 분열과 반목들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방안을 이 글은 고민 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
현재 광우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집회도 또한 가지고 있다.
국민으로서 자신들이 추구해야 하는 권리를 정당한 방법으로 주장하는 것이므로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어린 학생들까지 길거리 집회로 몰아 부치는 대한민국의 상황에 대해 토의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현 대한민국의 부정적인 상황 또는 어떤 종류의 힘이라고 전제 되는 것은 바로 폭력이다. 폭력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자면 물리적인 폭력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가 되도록 하는 일방적인 사실의 은폐, 축소 또는 억압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것들을 설명 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 독재등의 폭력의 역사에서 파생된 어떠한 폭력들 이 이루어 지고 있으며 언론의 책임에 대해 토의 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통합이 안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 함으로써 이 글은 끝이 날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 혹은 최근 200 년은 폭력의 역사라고 할 수 가 있다.
그러한 폭력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고 그것은 이미 일상화가 되어 버렸다.
예를 들면 접촉 사고가 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싸운다. 여성 운전자나 혹은 자신보다 물리적인 혹은 지위상의 힘이 약하다고 생각되면 그 사고를 자신의 고압적인 힘을 이용해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것은 이미 일상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민족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순 없다. 이것의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폭력의 효과성에 대해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것을 이미 폭력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특히 독재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지난 수 십 년 간 독재정권은 수 많은 종류의 폭력을 이용해서 통치 체제를 유지 해왔다. 독재 그 자체가 다른 의견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독재 그 자체를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의 가장 큰 문제는 당한 사람이건 폭력을 행사 했던 사람이건 폭력의 효과성 효율성 또는 유용성에 대해 익숙해지기 때문에 폭력의 재창조라고 하는 매우 커다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 할 지도 모른다 이미 십여 년 전에 끝난 독재가 그렇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서 현재 사회 전반에 걸친 부당한 권력의 횡포 즉 폭력을 그 탓으로 볼 수가 있는가?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 이다.
가해자이던 피해자이던 폭력의 효율성을 이미 맛 보았으면 그것을 쉽게 버릴 수가 없고 다음 세대들은 사회적인 학습에 의해서 그 것을 답습해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가 피해자 이면서 가해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폐해는 극단적으로 양분화 된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 그리고 그것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더욱 심각한 문제로 번져나간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취하고 있는 보수와 진영의 양당체제를 한국에서는 매우 특수하게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민족주의의 관점에 있어서 우리 나라 우익은 태생적인 비도덕성과 기득권으로 인해 거의 어떠한 역할도 맡아 하지 않는다.
그 역할은 좌익이 맡아 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개념은 때때로 사회주의 이념과 결합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서민들은 부자들에게 기득권을 내 놓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국가나 정부가 해주기를 기대 한다.
여기까지는 �찮은데 문제는 바로 사람들은 이 이견을 가지고 있는 두 개로 나누어진 그룹이나 집단이 공정한 경쟁이나 토론에 의한 합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미 체득한 폭력으로 이를 해결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이것을 인터넷 상이나 언론 등을 통해 관찰 할 수 있다. 보수 단체는 빨갱이 라는 등의 표현을 매우 자주 쓰고 그것은 자신들의 주장이나 생각을 타협이나 대화의 절차를 빼고 설득하려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폭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폭력의 효율성에 대해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으므로. 또 그것에 대항하는 반대편의 자세는 어떠한가? 그들도 또한 그 방법이 폭력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왜 대화를 하지 않은가? 지금 천계천에 나가 있는 평범한 이들은 무엇이 답답하여 자신들을 들어 달라며 거기에 있는가?
게임 이론이라는 경영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접하고 이용하는 유명한 가설이있다. 거기에는 두 개의 상반된 이익집단이 있으며 그들은 상대방과의 의사소통 단절 또는 상대방이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장 좋은 결정인 모두가 잘되는 결정을 하지 않고 최악의 또는 두 번째로 좋은 결정을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는 이론이다.
이 가설은 상호간의 대화와 협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럴 경우 최상의 결정 즉 둘 모두가 잘되는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면 상호 의사소통의 장을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답은 바로 언론에 있다.
언론의 기능을 여러분은 학창 시절 무엇이라고 배웠는가? 그것을 정부와 국회 등등에 대한 감시라고 대답 할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그것을 현재 대화와 타협이 자리 잡을 수 없는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또 다른 하나의 기능은 대화, 타협 그리고 양보의 장을 제공하는 것 또한 매우 필요하다.
하지만 언론은 또 하나의 형태의 권력으로서 그러한 기능의 제공을 경외 시 할 뿐더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기 위해서 사실의 축소, 왜곡 또는 성급한 일반화를 고의적으로 일삼고 있다. 이것은 노무현 전 정권의 시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와 그의 정부에 대한 평가를 이 글에 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정보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 양에서의 제한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정보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가 연설을 했다면 어떠한 연설을 했는가에 대한 모든 부분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자극 적인 부분 등 만 따로 보여지기 때문에 진짜 그가 했던 말들을 그러한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알고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가 이념에 사로 잡혀 정책을 결정 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것만 가지고 평가 할 때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에 일조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언론과 끊임없는 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와 언론과의 개인적인 싸움이라 보는가? 만약 그랬다면 그는 무책임한 대통령이라고도 평가 될 수 있는 것인 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언론이 대화와 타협의 장 마련을 위해서 사실관계만이라도 정확히 보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해야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가장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내가 찾은 가장 완전한 자료인 한국 피디 연합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언론은 여전히 그들의 힘을 그들 자신을 위해 쓰고 있고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의 장을 잃어버린 국민들은 지금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며 촛불 집회를 하고 있다. 한국 언론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우리 나라 교육의 현실도 또한 이러한 문제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학생들은 이성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 중 고 토 털어서 이 나라의 학생들은 무엇이 정답인지 틀린 것인 지를 강요 받는다. 현재 외국에서 공부하지만 여기에서 첫 수업마다 교수들이 하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좋은 답과 그렇지 않은 답이 있고 나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 답인가에 따라서 여러분의 결과물을 평가 할 것입니다” 이것은 대학교 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호주 모든 교육에 있어서 그렇다. 호주에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이 좋은 학과와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그것이 정도가 심하지는 않지만). 하지만 대학들은 점수가 좋은 학생을 받으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학생이 좋고 우수한 학생인가는 그 학교가 어떠한 교육을 제공 했는가에 잘려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우리 나라 대학들은 어떠한가? 똑똑한 학생을 뽑아서 그들의 비중으로 인해 좋은 대학 나쁜 대학이 갈려지지 않는가? 이러한 교육 환경에서 과연 더 좋은 교육과 더 좋은 학생들을 만들려는 노력을 우리 나라 대학은 하고 있을까?
항상 맞는 답을 강요 받고 자라온 학생들과 그들을 일렬로 세워 놓은 교육 정책은 매우 비이상적인 인간형을 만든다. 그 학생들은 비이상적인 억압(자율학습 등-이것은 매우 이 나라의 관점에서 매우 비이상적인 것 이다, 아동 폭력에 해당된다.)등을 통해서 비판 능력을 키우질 못한다. 좋은 답을 스스로 생각해내는 훈련이 전혀 안돼있고 무엇이 정답인지만 알면 되니깐.
이것에 대한 예를 들자면, 나는 한국에서 1년간 대학공부를 했고 유학을 왔고 한국에서 배운 똑 같은 과목을 시드니 대학에서 수학했다. 경영학에 마이클 포터의 5 포스 모델을 굉장히 유명해서 전 세계 경영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인데 한국 대학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것을 그냥 외우는 것이다. 100 자도 안되는 내용을 외우고 똑같이 쓰면 그는 매우 똑똑한 학생이 된다.
이런 반면 이 곳에서는 아주 좋은 학생들도 (사실 성적을 가지고 좋고 나쁜 학생을 가르지 않는다) 그 내용을 다 외우지 못한다. 다만 그 5 포스 모델에 반하는 다른 서적들을 읽어야 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어떤 케이스를 분석한 글 등 과 같은 다른 여러 책 또는 하술 서적에 발표된 내용들을 읽고 또 실제로 스스로 그 이론을 이용해서 하나의 케이스를 분석하거나 하는 등의 과제를 가지고 평가 받는다.
우리 나라에서 매우 똑똑한 학생들이 다른 나라 학생 들과 경쟁을 할 때 누가 경쟁에서 이기겠는가? 또한 학업에 목적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추구 하고자 할 때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더 성취감에서 오는 행복감을 느끼겠는가? 우리 나라 교육은 학생들을 모두 마키아밸리즘의 추종자로 만들고 있다.
똑똑한 학생일 수록 학생들은 주변 교육 환경 사회 환경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추구 할 수 이익만을 추구 하고 있다. 그런 똑똑한 학생들은 다시 이 사회의 권력층 또는 지도층이 되어서 구세대의 폭력의 메커니즘을 반복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교육에 경쟁이 메커니즘이 거의 모든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에 있어서 경쟁이라는 메커니즘도 필요하지만 정답만을 강요하는 교육에서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생산적이고 비경쟁적인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기성 세대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고민 해본 적이 있는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 왜냐면 나도 그러한 일괄적이고 억압적인 교육 시스템의 피해자로서 목격하고 경험해 온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교육에서 경쟁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없앨 수가 없기 대문이다.
그렇다면 정답만을 강요하는 교육 내용을 그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교육은 어떤 것이 정답인 줄 알려주지만 그것은 스스로 좋은 답을 알아내는 교육으로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교육하는 내용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면 좀 더 이성적이고 경쟁적이며 더불어 대화와 타협을 할 줄 아는 인재상을 배출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원문출처:
'Memento mor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터놓고 얘기합시다 5월 9일 - 이선영 주부 인터뷰 다시듣기 (0) | 2008.05.12 |
---|---|
미친 공장 - 지식채널 e (0) | 2008.05.09 |
제삿날 (0) | 2008.05.07 |
[스크랩] Re:[곽백수] 미친소 릴레이 (0) | 2008.05.06 |
한나라당 뉴라이트 공천 신청 명단 (0) | 2008.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