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
며칠 전에 생일이었다.
축하 해주는 것에는 익숙해도 축하 받는 일엔 여전히 낯선 느낌이 있는 나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주변에 생일이라는 걸 아예 숨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예 동생 가족들에게도 집에 오지 말라고 했고 선물 같은 것도 어차피 사용 안하고 집한 구석에 둬봤자 먼지만 쌓이게 되니 하지 말라고까지 했다.
항상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들만 사용하다보니 실제로 작년에 받은 생일 선물들이 방 한구석에서 포장 채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집에서 혼술이나 하면서 쉬려고 했었는데 어쩌다보니 또 우리 집에 같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 집안 식구들은 애어른을 안 가리고 참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ㅋ)
그런데 여느 때 같았으면 이런저런 음식들과 미역국 한 그릇 먹고 나선 설거지하고 끝났을 생일축하 모임이 이번에는 좀 달랐다.
매제와 조카들이 생일축하 선물로 본인들이 직접 그린 작품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멋쩍어 하면서 수줍게 내미는 작품들이라니... 너무나도 사랑스럽지 아니한가!
큰 조카에게는 특별히 고맙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조카가 동생 내외에게 “삼촌이 나 그림 잘 그렸다고 칭찬해줬어”라고 자랑을 하자 난 바로 조카의 말을 정정해줬다.
“아닌데? 잘 그렸다고 말한 게 아니라 고맙다고 했는데? 잘 그린 거랑 고마운 거랑은 다른 거야.”
조카왈 “그게 그거지 뭐”
그래... 어쩌면 그게 그거지 뭐...
오늘 아침 일찍 매제와 조카들이 주고 간 작품들을 사무실로 가져와서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문득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서울로 전학 오기 전 경기도 시골 어디쯤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 같은데 아마 여덟아홉 살 정도였을 것이다.
우리 동네는 못사는 동네 인 게 분명한 정도였는데 그 동네 안에서 부유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좋은 옷에 괜찮은 집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아마 덕은국민학교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같은 반 친구들에게 자기네 집으로 생일 초대를 했었던 것 같다.
생일 축하자리에 가려면 생일 선물이 필요했었기 때문에 난 어머니께 생일 선물을 살 돈을 달라고 졸랐던 것 같고 그때 우리집은 엄청 가난했었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그림을 그려서 선물해 주는 게 더 의미가 있는 거라고 하셨던 것 같다. (사실 이 부분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선명하진 않다.)
아무튼 난 꼭 선물을 사서 가야한다고 떼를 썼었던 것 같고 결국은 낚시하는 어부와 배가 그려진 그림과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당당하게 그 친구의 집에 갔더랬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바로 다음부터이다.
그 친구는 그림선물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방 한쪽에 치워뒀고 내가 사온 과자도 받는 둥 마는 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친구의 생일상엔 엄청난 과자 더미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가져온 과자 한 봉지는 너무나도 초라했던 것이다.
뭐 어린 초등학생 때야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 같은 건 없을 때였겠지만 아무튼 소심한 나에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큰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왔고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는데 산더미 같은 과자 앞에선 결국 나도 나약하고 초라한 초딩으로서 그 과자들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했었던 것 같다. (남은 과자들을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싸주셔서 집에 가져왔던 것 같기도 하다.)
해마다 때가 되면 생일의 의미는 뭘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한 때는 친구들이랑 거나하게 술 취하는 날이었던 적도 있었고 또 한 때는 오히려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더 감사해야 하는 날이라고 생각했었던 적도 있다.
마흔 넘어서부터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 아무튼 그림 작품들을 선물 받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적 그 친구가 좋아할 만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내 좋을 대로의 작품을 (그다지 공들여서 그린 그림도 아닌) 준 것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땐 나도 어렸으니깐...
매제와 조카들이 그려 준 작품들엔 나에 대한 이미지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나에겐 더욱 소중하고 의미있고 그렇다.
비록 맨날 집에서 맥주 마시는 삼촌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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