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오전 일찍부터 그림 그리러 사무실에 나왔다가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가 잘 안 떠올라서 빈둥거렸다.
창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빛조각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날도 좋은데 오랜만에 헌혈이나 하러 다녀오자란 생각이 들었다.
명일역에 있는 강동헌혈의집 (헌혈의집강동센터)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려고 길동역으로 향했는데 다음 열차 대기시간이 무려 12분... 이거 빨리 걸어갔으면 명일역까지 반 이상은 갔겠다 싶었는데 뭐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느긋하게 여유부리면서 가자고 맘먹으니 이것도 그럭저럭 기다릴 만 했다.
10시쯤 도착했는데 전에 한 번 다녀온 길이기도 하고 미리 지도도 검색하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길치인 나는 또 길을 10분쯤 헤매다 도착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이 1명밖에 없었다.
아무튼 혈소판혈장 가능하시냐고 물어보시는 간호사님의 요청에 따라 “예”라고 짧게 대답하고 간단한 혈액 검사를 마친 뒤 약 40분 정도 누워서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뉴스난 소식들을 둘러봤다.
휴대폰 속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은 가십거리든 정치, 사회 뉴스든 만날 거기서 거기인 별 감흥 없는 것들 투성이였는데 사람들이 줄임말인지 모르는 단어라고 하는 한 게시물을 보게 됐다.
* 게시글 작성자 // 알록달록 : ‘알도록달도록’의 준말 <- 이것도 ‘참 재밌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그 밑에 답글이 더 웃겼다.
* 답글 작성자 // ‘아니 그럼 끼룩끼룩도 끼루룩끼루룩이냐?’
* 게시글 작성자 // 끼룩끼룩 : ‘끼루룩끼루룩’의 준말 <- ㅋㅋㅋㅋㅋㅋ 정말 끼루룩끼루룩의 준말이었다.
이쯤 되면 줄임말 사용하는 건 거의 종족 특성이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휴대폰을 쳐다보는 것도 슬슬 지겨워졌을 즈음 간호사 선생님께서 미리 갖다 주신 헌혈증서와 기부권 카드를 무심코 바라봤는데 헌혈증서에 ‘보건복지부장관’이라고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내정된 양반이 참 내로남불 문제 많은 보건복지부장관 후보였던 것 같은데... 이 양반이 주는 헌혈증서는 받고 싶지 않은데??’
앞으로는 헌혈하기 싫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확 들었다.
어쨌든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행히 헤매지 않고 잘 도착할 수 있었고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좋아하는 중국집엘 들러 볶음밥을 먹은 뒤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날은 오전보다 더 좋았고 오늘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뿌듯함도 있었으며 볶음밥도 맛있게 잘 먹은 뒤라 기분이 참 좋았더랬다.
그렇게 돌아온 사무실 출입문 앞에는 커다란 다섯 개의 택배 박스 짐이 도착해 있었고 헌혈을 한 날은 무거운 짐을 들지 마시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당부 말씀이 귓가를 맴맴 맴돌고 있었다.
오늘도 참 운수 좋은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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