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날씨도 오락가락, 기분도 오락가락

조아진 2023. 7. 17. 23:17

날씨도 오락가락, 기분도 오락가락

이번 주 안에 세무사에 보내기로 한 영수증을 정리마던 중, 웬 60대 남자 어르신이 사무실 출입문 앞에서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누군가를 찾는다고 말씀하시길래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갔다.

현재 산재 휴직 중인 직원을 찾는 것 같길래 지금 병가 중이라 자리에 없다고 했더니 그 친구를 찾는 게 아니라 본인이 근로복지공단 산재 컨설팅 담당 시니어 컨설턴트인데 고용주에게 질문 할 것과 설명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다고 하셨더랬다.

이런 건 그냥 공단 직원이 전화나 이메일로 해도 될 일 같은데.. 노인 일자리 창출목적으로 만든 임시 보직 같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서 계시길래 내가 회사 대표라고 말씀드린 뒤 일단 안에 들어와서 앉으시라고 자리를 권해 드렸다. 사실 나도 회의실에서 혼자 영수증 분류 일을 하고 있던지라 에어콘을 가동하지 않아서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있었더랬다.

그 분의 질문은 산재 휴직 중인 직원이 10월 1일까지가 산재휴직 기간인데 직원이 그때 다 회복하면 다시 복귀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걸 왜 나한테 묻지? 싶었다.

원래 6월 중에 복귀하겠다던 녀석이 목발 짚고 버스타고 돌아다니다 넘어져서 수술한 부위의 염증이 도져 복귀가 더 늦어진단 얘기를 전에 들었던 터라 속으로 복귀하는 건 그 친구가 어디 안 돌아다니고 집에서 얌전히 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분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질문의 의도는 고용주가 다친 직원들을 어떻게 처우하는지, 이런저런 지원제도가 있으니 되도록이면 해고하지 말라는 뭐 그런 의도가 담긴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챘고 그 친구는 그냥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 붙들고 일하는 사무직이라 당연히 복직 가능하다고 말씀 드렸다. 그랬더니 서류 한 장을 꺼내시더니 '복직'에 체크, 내 친필 서명까지 받았더랬다.

내가 그 친구더러 트럭 위로 올라가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본인의 부주의로 뛰어 내려오다 다친 건데.. 당연히 다 나으면 회사에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재활병원이 집 바로 근처인데 버스는 왜 타고 돌아다니다 또 다쳤는지 묻지도 않았건만.. 그러면서 또다른 설명 책자를 꺼내시면서 산재로 휴직 중인 직원의 일은 누가 지금 대신하고 있느냐고 묻길래 "제가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더니 "아.. 그럼 이 지원제도는 고용주분이라 해당사항 없겠습니다. 허허.." 나도 "허허.."

그렇게 어색한 웃음으로 용무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그 분이 갑자기 질문이 있다고 하셨다. "제 손주가 미숙아로 태어나서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인데도 아직 한글을 못 뗄 정도로 좀 많이 늦어요. 그런데 동네에서 미술학원을 다니는 모양인데 거기 선생님이 우리 손주 그림이 되게 독특하고 뭔가 좀 남다른 데가 있데요. 선생님은 전문가실 테니까.. 좀 어떤 것 같아요?"

내가 그 친구 작품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아직도 미혼인지라 다른 집 귀한 자식에 대해서 뭐 어떻게 케어하시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드리기도 좀 애매하긴 했으나 내 조카들도 미숙아로 태어나 그 성장과정을 지켜본 삼촌으로서 뭔가 동질감, 측은지심 같은 것들이 생겨서 몇가지 조언을 해드렸다.

"지금 배우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미술의 스킬, 기술성을 보지 마시고 그림 안에 담긴 생각들, 이야기들을 집중해서 보세요. 지금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단계 보다 그 친구가 이 미술활동에 얼마나 즐겁게 임하고 있는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워했던 부분들이 그림 안에 담겨져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 친구가 미술활동은 좋아하나요?" "네! 아주 좋아합니다!" "네, 그 미술학원 선생님이 정말 잘 가르치시나 보네요~ 지금 단계는 그거면 족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허허" 가시는 길에 드시라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드리며 자리가 마무리 되었다.

다시 영수증 정리를 시작했고 밤 9시 좀 넘어 끝났는데 사실 이제야 밝히는 거지만 그분 콧구멍에서 하얀 콧털이 뭉텅이로 빠져나와 있었던 장면이 계속 떠올라 히죽거리면서 일을 해서 그런지 그닥 피곤하진 않았더랬다.

아무튼 드디어 2023년도 상반기 영수증 정리 끝! 좀 더 정확하게는 내일 공문을 다시 꼼꼼하게 확인한 뒤 빠진 제출 자료 없나 확인해야 하지만 일단은 끝.  퇴근 후엔 어무이가 만들어 놓으신 무생채와 콩나물 무침을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서 맛나게 먹었더랬다.

식사 후엔 씻고 담배피러 뒷마당에 나갔는데 어제 챙겨준 길고양이 사료 그릇이 별로 안 줄어 있는 걸 확인. 최근 연일 비가 오는 통에 사료가 젖어서 계속 버리고 채우길 반복 했었는데 그제 밤에 하양이가 넉살좋게 우리집 뒷문 근처에 와서는 밥달라고 쪼그리고 앉아 있길래 통조림을 하나 까줬더니 허겁지겁 먹드만.. 그에반해 노랭이는 여전히 겁이 많아서 내가 근처에 있으면 안전 거리를 유지하고는 계속 경계 모드.. 그런 표정하지 말고 밥이나 드셔..

뭔가 참 날씨도 오락가락, 기분도 오락가락. 길고도 짧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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