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봉선화의 집과 아라카와 강변 그리고 신민자, 박재동 선생님

조아진 2023. 8. 27. 17:19

봉선화의 집과 아라카와 강변 그리고 신민자, 박재동 선생님

 

일본에서의 관동대지진 100년 만의 통곡 아이고전 진행 중 전시장 지킴이 비번인 작가들과 함께 일본의 도쿄도 스미다구 야히로 역 인근에 있는 봉선화의 집과 아라카와 강변을 찾았습니다.

 

일본의 날씨는 한국보다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뜨겁고 숨이 턱턱턱 세 번 막힐 정도로 습해서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사우나 찜통에 있는 것 같이 땀이 줄줄줄 흘렀는데 이날은 다행히도 바람이 좀 불어줬습니다.

 

놀랍게도 봉선화의 집은 역에서 꽤나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주변은 작은 주택가들이었고 그 틈 사이에 소박하고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봉선화의 집은 간토대학살 이후 몇 십 년이 지나 일본인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조선인 희생자들의 추모 공간입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1950년 경 한 일본인 교사가 아라카와 강이 만들어진 계기를 공부하던 도중 일본인 어르신들로부터 믿지 못할 증언들을 듣게 됩니다.

 

일본인 교사는 도서관에서 자료 조사를 하면서 아라카와 강이 인공적으로 길을 내서 만든 강이었고 그 당시 다리 역시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고 계시던 어르신들에게 인터뷰를 하면서 간토대지진 때 있었던 조선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대지진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대재앙이었고 사람들은 걷잡을 수없이 번지는 화마를 피해 다리 건너를 향해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경제난을 겪고 있었고 일본 국민들은 정부에 불만이 컸습니다. 더욱이 강제 징용으로 인해 끌려온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싼 값에 거칠고 힘든 일들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일본 국민들은 이들이 자신들의 일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여 외노자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한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엔 일본인 사회주의자들도 정부에 불만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던 터라 일본 정부는 국민들이 정부를 반대하는 퇴진 집회, 시위 운동을 벌일 것을 두려워했고 일본 정부는 아주 끔찍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이 대재앙을 이용하여 그 불만세력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라는 내용을 군부대에 전달하고 군부대는 다시 전보를 통해 각 지역의 경찰서와 신문사에 전달, 이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일본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민간인들은 광기에 빠지게 되고 조선인들을 향한 대학살이 시작됩니다. 일본 민간인들은 자경단을 결성하여 십오엔 오십전, 쥬고엔 고쥬센이라는 발음을 시켜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더불어 타지역에서 온 같은 일본인이지만 발음이나 억양이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 광기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인 교사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지역에 이러한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조선인 학살에 대해 정부는 함구하고 있었으나 공공연히 알고 있었기에 관공서와 신문 등에서도 관심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아라카와 강변을 조사하며 원래 희생자가 묻혔을 장소라고 추정되는 곳은 도로가 있어서 파 볼 수가 없었고 그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을 깊게 팠지만 결국 유골은 발견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땅을 파면서 그 당시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비닐봉투가 발견되기도 하고 또 인근에는 훗날에 만들어진 이상한 다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옆에 직선으로 잘 뻗은 다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져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고 합니다. 마치 무언가를 덮어 버리기 위해 일부러 만든 다리 인 것 같다고요.

 

결국 희생자들의 유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장소는 파볼 수가 없었고 일본인들은 아라카와 강변에 나와 그 날의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 추모제를 열기 시작하게 됩니다. 추모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재일동포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고 추모제 이후 사람들이 친목도모를 위해 방문했던 곳이 현재의 봉선화의 집이라고 합니다.

 

원래 그 장소는 일본인이 이자카야를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추모를 하고 돌아온 손님들의 이야기를 몇 년간 계속 들어보니 추모를 위한 공간, 땅이 절실히 필요한데 모두 거부를 당해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을 듣게 되고는 이 가게와 이 자리의 땅을 팔게 되신 것이라고 합니다.

 

봉선화의 집 왼편에는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지게 되었고 오른쪽에 지어진 작은 집 안엔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한 사진과 신문들이 온 벽면에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벽의 한 구석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한국 만화계의 대부이신 박재동 선생님의 사진과 글, 그림이 일본의 신문에 소개되고 있었던 것을 스크랩해서 붙여 놓으셨던 것입니다.

 

간토대학살 당시 일본인 모두가 미쳐 돌아갔던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순수한 선의였는지 혹은 사이좋은 주인과 노예관계에서 형성된 아이러니한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부리던 조선인들을 숨겨주었다고 합니다.

 

천정에, 장롱에, 다리 밑에... 그렇게 조선인들을 숨겨준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일본 옷까지 내어주고 배까지 태워 먼 곳으로 피난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한 조선인 소년의 이야기가 박재동 선생님의 글 그림에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박재동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살아남은 조선인 중에 한 명이었고 그 당시 자신의 조부를 숨겨주었던 하숙집 일본인 주인 내외를 찾아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는 내용의 신문기사였습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왜냐하면 간토대학살 100년을 맞아 그 조선인 희생자의 손자인 박재동 선생님이 아이고전을 하기 위해 작품을 출품했고 저희들과 함께 일본에서 함께 전시를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같이 전시하러 온 모든 작가들도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었고 그 비극의 시간 속에서 이렇게 놀라운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소름끼치도록 놀라웠습니다.

 

박재동 선생님이 함께 일본에 오셨다면 이러한 내용을 설명해 주신 봉선화의 집 신민자 선생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을 지가 너무나도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토록 긴 아픔의 역사를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신 신민자 선생님은 재일교포 3세로 한국의 작가들이 봉선화의 집에 방문한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하고 오히려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을 빌러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고 고마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봉선화의 집 왼편의 추모 공간에는 아직 피지는 않았지만 봉선화 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재일동포들이 억울하게 이역 땅에서 숨져간 넋을 달래기 위해 심은 꽃이 바로 봉선화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령의 연세에도 열정적으로 우리 한국작가들을 위해 설명을 해주시던 신민자 선생님의 손에는 곱디고운 봉숭아물이 들어있었습니다.

 

마지막 사진은 이호 작가님이 촬영하신 사진으로 아라카와 강변에서 열정적으로 강의를 해주시던 신민자 선생님의 사진입니다. 그 손끝의 봉숭아물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민자 선생님~!!

 

 

 

 

 

 

박재동 / 간토 학살 4 / 40 x 50cm / 종이에 먹과 파스텔 / 2023

 

 

* 박재동 선생님의 작품도 아이고전 서울 전시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 간토대학살 100년 만의 통곡 아이고전 서울 전시는 202391일 금요일부터 9일 토요일까지 전태일 기념관에서 오후 5시에 개막합니다.

 

전태일 기념관은 월요일은 휴관이며 관람시간은 오전 10~ 오후 6시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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