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기 / PC방 탈출과 앙카
어제 오전에 갑자기 사무실 형광등 전체가 나갔다.
두꺼비 집을 찾아 떨어진 차단기를 올려봤는데도 계속 떨어진다.
몇 달 전부터 대회의실 천장에서 물이 새서 위층에 누수가 있다는 걸 알려줬는데 최근에는 우리 사무실 쪽까지 물이 떨어지고 있었더랬다. 정황상 이건 누수로 인한 누전이었으므로 동네 전기 수리점을 검색해서 출장 요청을 했다.
기사님이 천장의 관찰구 이곳저곳을 열어 보시더니 위쪽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누수가 오랫동안 계속된 것으로 확인되며 누전 또한 위층 누수로 인한 것이 맞다고 했다. (심지어 천장에 종유석도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누수를 잡기 전에 전선을 살려봤자 다시 누전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괜히 비싼 돈 들이지 마시고 일단 위층 누수부터 잡으라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신다.
워낙 광범위하고 많은 곳에서 천장 누수가 일어나고 있어서 위층 공사도 대공사가 될 것이고 우리쪽 전선 공사도 기존의 것을 살리기 보다는 새로 다시 다 까는 것이 빠르고 안전할 거라고 일러두신다. 불이 날 수도 있으니 차단기는 올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그런데 얼마 뒤 위층 주인이 혹시 2층에 빗물이 새서 그런 거 아니냐고 전기기사님에게 확인 전화를 하셨단다. 기사님 왈 “빗물 때문이면 옥상 바로 아래층부터 누수가 일어나야 하는데 무슨 마술도 아니고 중간층을 건너뛰고 2층만 누수가 됩니까? 이건 3층 누수가 맞습니다.” 라고 하셨다고. 음...
암튼 어제는 3층에서 뭔가 조치를 취해주길 기다리며 그렇게 어둑어둑한 상태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더 큰 문제는 화요일과 수요일에 전체교사회의가 있다는 사실. 결국 공사가 언제 시작될지 몰라 이번 주 예정된 회의를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그렇게 일하던 중 직원 하나가 말했다. “PC방 느낌 나고 좋은데요?”
하지만 저녁 6시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 혼자만 남게 되자 모니터 불빛도 모두 사라져 더 이상 PC방도 못 되게 되었다.
어제가 어무이 생신이라 꽃다발을 사야해서 일단은 퇴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일 조명 가게에 가서 스탠드 조명이라도 사야지 생각했더랬다.
다음 날이 되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전화 문의내용을 정리하던 직원이 대화하는 걸 듣고 갑자기 조명 가게 생각이 났다. “발신자 전화번호가 안 보여요...”
그렇게 나는 바로 동네 조명 가게로 출발. 가게에서 스탠드 조명 큰 걸 사려고 했는데 그런 건 없다고 한다. 음... 하는 수없이 형광등과 콘센트 줄, 멀티탭을 사서 직접 달기로 한다. (천장 누수라서 세우는 등을 사려고 했는데 뭐 물건이 없으니...)
먼저 형광등을 달 위치를 연필로 표시하고 앙카를 심기 위해 작은 나사못으로 홈을 뚫는다. 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 있었는데 밑에 있던 직원 둘이 구경하며 밑에 내려오지 마시고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하라고 해서 거기 책상 위에 앙카 좀 달라고 했다.
그런데 책상 위에 있는 나사못과 고정쇠 그리고 앙카까지 다 집어 준다.
나 : “아니. 앙카만 달라니까 왜 이걸 다...”
직원 A : “어디요? 이거요?”
직원 B : “앙카 거기 그거요.”
나 : “거기 하얀 거요.”
직원 A : “앙카가 뭔지 몰라서요...”
나 : “아...”
직원 B : “괜찮아요~ 저도 앙카가 뭔지 몰랐는데 여기 회사 와서 배웠어요. 교육업체인데 제가 왜 앙카를 알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나는 왜 알고 있는가... 그저 그냥 알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우리 가족들은 50번 넘게 쫓겨나듯 이사를 다녔고 상가건물을 얻으면 3/2는 미술학원. 나머지 1/3은 집으로 개조해서 식구들이 함께 살았더랬다.
그때마다 아부지는 목공, 전기, 수도, 도배, 가스 설치 일을 직접 하셨고 우리 가족 모두는 ‘시다’가 되어 어깨너머로 자연스레 일을 배우게 되었던 것인데 톱질 하는 법, 망치질 하는 법, 전기 선 만지는 법 등등 대개의 ‘노가다’ 지식들이 그때 다 학습된 것이다.
암튼 나중에 전선 대공사 예정이라 깔끔하게 설치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적당히 선이 많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하는 정도로 해서 형광등을 설치했다.
사실 천장 덱스 다 제거하면 배선 공사도 직접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물론 아부지랑 같이. 아부지는 난 이제 힘들어서 못 한다고 하시겠지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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