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새해 다짐 : 적당히 살자

조아진 2022. 12. 31. 20:05

새해 다짐 : 적당히 살자

 

 

에피소드 하나

 

어제 저녁에 어무이가 같이 영화 한편 보자고 하셔서 그러자고 했고 퇴근 후 집에 가기 전에 길고양이 사료를 사기 위해 사무실에서 가까운 다이소엘 갔는데 요새 사료 충전을 안 해 놓더니만 결국 사료 매대가 싹 비워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길동 시장 안쪽 우체국 방향에 있는 러브캣 코리아 멀티펫샵 애견용품 할인마트...(이름 참 길다.)로 향했다.

 

이곳은 몇 년 전에 노령견 짜장이를 키울 때 사료나 간식을 사러 종종 왔던 곳인데 짜장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 뒤에 다시 찾게 될 줄은 정말 몰랐더랬다.

 

사장님께 고양이 사료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고 어떤 종류의 고양이냐고 물으시길래 그냥 길고양이 주려고요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브랜드로 세 포대를 골랐는데 계산하고 나갈 때 사장님이 서비스로 이것저것 더 얹어 주시면서 츄르?라고 부르는 놈도 하나 주셨다.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고양이가 환장한다는 바로 그것인가? 이것만 있으면 고양이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내 앞으로 무엇에라도 홀린 것 마냥 자연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인가?? ... 아무튼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가게를 나왔고 시장에 온 김에 삐삐네 떡볶이 가게를 들러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산 뒤 집으로 향했다.

 

 

에피소드 둘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볼 영화를 올레TV로 검색하는데 볼 만한 영화가 없어서 한참을 채널을 넘기며 서칭을 하던 중 영화 리멤버를 발견했다. 예고편을 보니 어! 이 영화는 전에 인스타그램 친구분께서 추천해 주신 이성민 배우 주연의 영화!! 오늘은 너로 정했다~!!

 

간략하게 소개를 하자면 뇌종양 말기의 80대 알츠하이머 환자인 이성민 배우역의 주인공이 모든 기억을 잃기 전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복수에 대한 이야기이고 친일파들과 또 방관자들에 대한 질문을 직설적으로 하는... 그런 영화인 듯 하다. 마지막엔 눈물도 찔끔 났고 언젠가 제대로 리뷰를 해도 좋을 영화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아무튼 오늘은 아니다.

 

불만이 있다면 제목이 좀 아쉽다는 것... 뭔가 더 확실한 타이틀이 있을 법도 한데 그냥 흔한 영어식 제목을 지은 것 같았고 또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빨간색 포르쉐가 저렇게 자유롭게 활개를 치나 정도? 연기들도 모두 훌륭했고 특히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마지막은 현세대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연출이라 꽤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다.

 

 

에피소드 셋

 

지지난 주 월요일 새벽엔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꿈에 나왔더랬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차사고 전엔 유모차를 밀고 다니시면서 나름 정정하게 외부 활동을 하셨던 분인데 사고 이후 제대로 된 치료를 제 때 못 받았고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방에 누워만 계셨더랬다.

 

전주에서 서울로 모시고 와선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모셨었고 그때 다행히? 내가 대학원 다니는 백수라 나름 잘 모신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이번 꿈속에서의 외할머니는 정정하게 서 계셨었다.

 

장소는 전주 외가댁인 듯 했고 나는 20대 초반 정도 되는 나이였던 것 같은데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안 되는 듯한 분위기였고 할머니께서 침울해 하셔서 나는 온갖 재롱을 부리며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면서 귀여운? 손주한테 이것저것 먹을 걸 챙겨 주셨고 나는 엄청 맛있다고 역시 할머니 음식이 최고라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할머니께서 좀 기분 전환이 되신 듯 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친척들도 어머니 음식이 최고예요”, “할머니 음식 정말 짱이예요를 연발하자 외할머니께서는 저녁에 맛난 거 좀 해먹자고 하시며 시장에 장을 좀 보러 다녀오시겠다면서 유모차를 끌고 나가시면서 꿈이 희미해 졌다.

 

 

에피소드 넷

 

꿈을 꾸고 난 뒤 난 몇 시간 뒤에 출근을 했고 새끼손가락 봉와직염 진료를 위해 업무 도중 잠깐 병원을 찾았는데 그날 담당 의사로부터 손가락이 잘 안 굽혀지는 영구적 손상 즉, 의사 왈 이른바 장애라고 부르는 것 말씀이예요.”라는 진단을 듣게 된다.

 

다쳤을 때 치료 골든 타임이 2주인데 난 그 시간을 놓친 뒤 병원을 찾은 게 원인이라는 것이었고 수술을 해서 손가락을 굽혀 심을 박은 뒤 손가락이 완전히 펴지지는 않아도 굽힐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냥 손가락이 펴지기는 하는데 굽혀지지는 않는 방법 중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는데 난 그냥 이대로 사는 쪽을 택했다.

 

나는 이후로 왕자병 걸린 사람마냥 새끼손가락을 들고 컵을 드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에피소드 다섯

오늘은 오전에 부모님 전시 신청서 작업과 회사 홍보 일을 좀 하다가 블로그에 글을 쓰면 받는 해피빈 기부콩 소멸 알림이 와서 어디에 기부를 할까 사연들을 찾아보았는데 길동 지역아동보호센터라는 곳에서 모금하는 소식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타지역 소식들만 접하다가 정작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길동에 대한 사연은 처음 접한 것 같아 이번에 모은 기부콩은 이 친구에게 사용하기로 했다. 정이(가명?)라는 이 친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라는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고 이번에 대학에 가게 되어 입학금 등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기부콩과 소액 기부를 더해서 기부를 한 뒤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래도 올해 마지막 날인데 일만 하긴 좀 그런 것 같아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문득 오후 5시에 어머니와 마트에 장보러 가기로 한 일이 떠올라 후다닥 집으로 가서 함께 장을 본 뒤 지금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글을 마무리한다.

 

 

에필로그

 

크게 중요하지도 대단한 일도 아닌 일기를 정리하면서 적당히 살자란 문장이 머릿속에 내내 맴돌았다.

 

무지개 다리를 건넌 노령견 때문에 가슴 아팠던 기억도, 친일파와 같이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분노에 가득 찬 삶도, 큰 장애는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장애를 갖게 되는 경험도, 또 외할머니 살아생전에 좀 더 잘 해드리지 못했던 죄송한 마음도 그리고 소소하고 미미한 기부활동을 하는 것도!

 

내년에도 너무 깊이 생각하지도 안 좋은 감정에 함몰되지도 않는 적당한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추신. 그래도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분노는 어쩔 수 없지요. 우리 가족도 상처에 딱쟁이가 생기기까지 20년은 족히 걸린 듯 합니다. 세월호 유가족 분들도 그리고 이태원 참사 유가족 분들도 그저 너무 큰 상실감과 분노에 스스로를 절망에 가두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내년에도 잊지 않고 마음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정이 학생에게 기부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 참조하세요.

https://happybean.naver.com/donations/H000000188086?redirectYN=N

 

 

 

 

#일기 #적당히살자 #꺾이지않는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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